PALIMPSEST_시간의 지층



단순히 낡은 창고와 버려진 터. 부산항 제1부두의 첫인상은 그 가치를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고요했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본 순간, 수탈의 아픔을 딛고 수많은 생명을 품어낸 100년의 굴곡진 역사가 겹겹이 숨 쉬고 있었다. 들여다보아야만 비로소 진가가 보이는 근대문화유산. 그렇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던 이 거대한 시간의 층위를 어떻게 세상에 드러낼 수 있을까. 침묵하던 흔적들을 섬세하게 발굴하고 그 위에 새로운 일상의 켜를 덧대어, 잊힌 역사를 미래의 평화로 잇는 여정을 시작한다.

심규리 Sim Gyu Ri

Studio 1 


[대지분석]

부산항 제1부두는 시대의 필요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해 온 땅이다. 비록 그 탄생은 수탈을 위한 영예롭지 못한 시작이었으나, 한국전쟁기를 기점으로 피란민들의 생존과 물류의 거점으로서 희망의 인프라로 뒤바뀐 극적인 의미 전환에 주목했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기억의 축]

현재 부산 도심에는 한국전쟁기의 기억을 간직한 11개의 피란수도 유산이 하나의 도로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다. 이 선형의 흐름은 부산항 제1부두를 거쳐 미래의 북항 재개발 구역까지 입체적으로 이어진다. 과거와 미래를 매개하는 이 축의 중심에서, 제1부두가 도심의 기억들을 확장시키는 ‘기억의 관문’이자 세계유산기념관이 되길 원했다.

 

[개념 : 팔림세스트]

따라서 이 대지를 ‘팔림세스트’의 관점으로 조명했다. 원래의 글씨 위에 새로운 글을 덧쓴 양피지처럼,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이 겹겹이 쌓이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해온 제1부두 역시 거대한 역사적 팔림세스트다. 지표면 아래 잠든 과거의 층위를 드러내고 남겨진 흔적 위에 새로운 켜를 중첩하여 과거의 기억과 현대의 일상이 교차하는 공간을 구성했다.

 

[디자인 전략]

첫째, 시대의 흔적을 재해석한 세 개의 건축적 앵커다. 1970년대에 지어진 거대한 기존 창고는 과거 전 세계가 한국전쟁기 때 모여들었던 것처럼 다채로운 교류가 일어나는 ‘글로벌 교류 플랫폼’으로 활용했다. 옛 잔교역 터는 11개의 유산을 가이드하는 세계유산기념관으로, 옛 상옥 터는 연구와 아카이브를 위한 공간으로 조성하여 각기 다른 시간의 층위를 하나의 대지에 공존시켰다.

 

둘째, 기존 건축적 언어의 차용이다. 기존 창고의 지붕 기울기와 특유의 규칙적인 기둥열을 신축 매스에 차용하여, 과거의 건축적 언어가 현대에도 연속성을 갖는 조화로운 풍경을 구축했다.

 

셋째, 시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브릿지다. 과거 바다와 육지를 잇던 잔교역의 환승 기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입체적인 브릿지가 각기 다른 시대의 흔적을 품은 건물들을 물리적으로 연결하며, 과거의 켜와 현대의 일상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시공간의 매개체로 작동한다.

 

[유산의 보존 및 활용 전략]

기존 창고는 역사적 실루엣을 유지할 최소한의 뼈대만 남긴 채, 폐쇄적이던 출입문을 유리창으로 바꾸어 도서관, F&B, 컨퍼런스 홀이 있는 열린 공간으로 만들었다. 인위적인 평탄화 대신 기존의 바닥 경사를 활용하여 평지와 슬로프가 자연스럽게 엇갈리며 공간을 구획하도록 했다. 대지 내 발굴된 두 곳의 유적 터 중 하나는 시민들에게 친화적인 ‘필드 뮤지엄’ 공원으로, 다른 하나는 조금 더 깊은 ‘지하 전시관’으로 구성하여 유적 자체를 디스플레이로 활용했다. 또한 과거 철도의 흔적 중 하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램프로 치환했다. 관람객들은 이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며 지층의 단면을 느끼고, 묵직한 역사의 심연 속으로 온전히 몰입하게 된다.

 

[결론]

침묵하던 흔적들을 섬세하게 발굴하고, 그 위에 새로운 일상의 켜를 덧댄 기억의 지층. 이 공간이 과거의 뼈아픈 역사를 미래의 평화로 잇는 진정한 관문이 되기를 바란다.